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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교육철학

아동관과 유아교육

by ⍣Humpback whale⍣ 202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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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관

1. 아동의 개념

아동은 ‘어린아이’를 말한다. ‘어리다’라는 말은 신체적으로는 어떤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를, 정신적으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이 부족하고 경험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신체적·정신적으로 미숙한 상태의 존재를 뜻한다. 아동의 의미는 어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한자어 아동(兒童)의 ‘아(亞)’는 절구 ‘구(臼)’와 사람 ‘인(人)’이 합해진 상형문자로 ‘머리 모양이 절구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고, ‘동(童)’은 마을 ‘리(里)’와 설 ‘립(立)’이 합해져 ‘마을에 서서 놀고 있는 절구 같은 머리를 한 사람’이라는 뜻(백혜리, 2003)이다. 영어의 아동은 ‘child’로 고대 영어의 ‘cild‘, ’kilpam’에서 유래했다(정미라, 1993). 이는 자궁이라는 뜻의 ‘kilpei’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세에 ‘childer’, ‘childre’로 되었고 이후 ‘child’로 변화되었다. 아동의 어원은 공통으로 연약하고 완전하지 못하며 미성숙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아동이 소아(小兒), 유아(幼兒), 해아(孩兒), 동치(童稚), 동몽(童蒙) 등 으로도 지칭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소아(小兒)는 작은 사람, 유아(幼兒)는 실같이 가는 힘을 가진 아이, 해아(孩兒)는 체구에 비해 머리가 큰 벙글벙글 웃는 사람, 그리고 동치(童稚)는 벼가 새 꼬리만큼 자란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어리다는 말이며(백혜리, 2003), 동몽(童蒙)은 어려서 사리에 아직 어두운 아이라는 뜻이다. 즉, 아동은 신체나 능력 면에서 아직 성인과 같이 성장하지 않은 어린 상태를 지칭한다.

 

아동의 이러한 개념은 성인에게 의존하는 존재, 성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내포하지만 오늘날은 아동도 한 개인으로서의 가치관이나 인격을 지닌 독립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도 있다. 이는 아동의 인권과 가치를 존중하는 것으로 아동의 개념이 이전과 다른 양상임을 보여 준다.

 

2. 아동관의 이해

어느 사회나 어린아이가 없었던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항상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즉, 아동관은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반영하여 형성되었는데 유럽 사회의 경우 아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불필요한 존재에서 필요한 존재로, 그리고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에서 독립성과 인격을 지닌 존재로 변화하였다. 동양의 경우 이러한 변화는 아주 미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동관은 그 시대의 정신이나 문화에 따라 변화해 왔다.

 

1) 전성설

전성설(前成說, preformationism)은 중세 유럽에 있었던 유아에 대한 관점으로 유아를 ‘성인의 축소판’(ready-made miniature adult)’으로 바라보았다. 이 관점은 완성체인 인간의 모습이 정자나 난자 속에 크기가 작은 상태로 이미 들어가 있으며 그 상태로 태어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인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축소된 인간의 모습이 정자나 난자에 들어 있는 모습은 극미인(極微人, homonulus)으로 너무 작아 보기 어려우며 출산으로 태어난 아기는 이후 크기와 부피가 달라져 성인이 된다. 따라서 유아는 성인에 비해 능력이나 역할 등에서 다르지 않고 신체적 크기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여 유아가 걷고 말할 수 있게 되면 성인의 옷을 입혔고 성인과 똑같은 일을 하게 하였다.

 

전성절은 성인의 입장에서 유아를 부속물로 바라보는 것이다. 유아가 능력이나 자질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유아를 부속물로 바라보거나 성인과 같은 일을 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성설의 아동관이 있었던 당시 사회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당시 사회는 영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유아의 개인 자질이나 인격 등과 같은 특성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혹은 인격체로 취급한다는 것에 주저하였던 것(Aries, 1962)으로 여겨진다. 둘째, 성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이나 관점 및 처지와 동일한 형태와 기능을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Ausubel, 1958). 이로 인해 어린이를 매매하거나 혹은 생명을 빼앗는 일, 육체적 노동을 시키는 일 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전성설의 아동관은 중세의 미술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중세 화가들은 유아를 그릴 때 얼굴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신체 크기로 성인과 유아를 구분하였는데, 이는 유아를 성인과 같은 입장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전성설은 과학적 사고가 강조되면서 점차 쇠퇴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성설과 같은 관점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영아나 유아를 성인과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고 대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전성설의 모습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2) 원죄설

원죄설(原罪說)은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관점이다. 원죄설은 아동 관점이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관점으로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 원죄설에 의하면 지상의 낙원에서 죄를 지어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간은 이들의 원죄(原罪)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태어난 갓난아기도 원죄가 있으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관점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훈련과 교육을 강조한다. 원죄설에 입각한 아동관은 아동을 엄격하게 훈련시키고 교육시켜야 하며 유아가 가진 충동이나 공격적인 성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3) 백지설

백지설(白紙設, tabula rasa)은 인간이 태어날 때 선한 존재나 악한 존재가 아닌 무(無)의 상태인 백지 상태로 태어나 주위 환경의 영향에 의해 점차 인간으로서의 성격이나 특성이 갖추어진다는 입장이다. 백지설은 로크(John, Locke)가 주장한 것으로 로크는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관점과 태어나기 전부터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입장을 부정하고, 대신 유아의 성품이나 능력은 주위 환경으로 인해 형성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로크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난 유아가 수학이나 논리에 대해 모르는 것으로 볼 때 이미 어떤 정신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로크의 이러한 입장은 본유관념론을 반박하는 것으로, 본유관념론(本有觀念論, doctrine of innate ideas)은 인간의 정신은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생래적(生來的)임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보유관념론에 의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있는 정신을 상기(想起)시키는 일이다.

 

로크는 본유관념론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이성이나 정신이 채워지는 것은 이미 있었던 어떤 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無)의 상태로 태어난 유아가 주변 환경을 경험하면서 점차 유(有)의 모습으로 변하여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백지설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주위의 환경이 어떻게 구성되는지가 중요해진다.

 

백지설은 인간 정신의 형성에 대한 환경결정론을 설명해 준다. 환경결정론(環境決定論)은 인간의 능력은 주위 상황에 달려 있으며, 인간은 가진 능력이나 역할보다 주위의 인물이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후천적으로 어떤 환경을 제공해서 성품이나 능력을 변화시키는가에 초점을 둔다. 백지설과 환경결정론에 근거하면 유아의 가정이나 사회의 역할은 능력이나 성품의 형성에 아주 중요하다. 또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에 따라 정신의 형성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 어떤 정신을 가지지 않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 주위 환경에 의해 점차 그 인격이나 정신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바른 인간으로 기르기 위해서는 유아에게 필요한 좋은 경험을 제공해 주어야 하고 좋은 환경에 유아를 노출시켜야 한다.

 

4) 성선설

성선설(性善說)은 인간을 선한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유아를 선한 존재로 바라본다. 성선설은 서양에서는 루소에 의해 그리고 동양에서는 맹자(孟子)에 의해 제기되었다. 루소 이전에는 전성설(前成說)이 지배적이었다. 12세기 전후의 중세 미술작품에 나타난 유아들은 특징이 없고 표정이나 외모에서 성인과 차이가 없이 단순히 크기만 작게 묘사되었고, 벌거벗은 몸도 성인과 같은 근육조직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루소에 의해 변화를 맞았다(Aries, 1962).

 

루소에 따르면 태어나는 인간은 창조자의 손에 의해 자연성(自然性)을 가지고 선하게 태어난다(장화선, 1993). 즉, 인간의 마음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으로 사악(邪惡)과 악덕(惡德)이 전혀 없다. 사악하지 않고 악덕하지 않은 것은 자연의 상태로 인간의 본성을 지칭한다. 루소의 성선(性善)은 사회의 도덕 가치규범이나 행위규범의 차원에서 말하는 선(善)의 개념이 아니다. 사회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규율이나 질서를 준수하여 나타나는 착한 행실의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도덕규범과 질서를 준수하기 이전의 상태인 무구한 자연인의 상태가 곧 선(善)이다. 루소가 말하는 선(善)의 상태는 행복과 연결된 것으로 불행이란 자신의 욕망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능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생기는 것(장화선, 1993)이며,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능력과 욕망이 서로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선한 존재인 인간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거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행동에 어떤 제약이나 장애가 있어서는 안 되며 교육은 미래의 준비가 아닌 현재 상태에서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이처럼 선한 유아의 본성은 사회에 의해 오염되어 악해지므로 선한 유아를 악한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유아가 가진 본래의 모습에 부합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본래 선한 존재인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그것을 위한 교육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곧 소극적인 교육이다.

 

동양에서 성선설의 성(性)은 인간의 생명과 본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범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인성(人性)을 이해하려는 개념이다(유승권, 2011). 따라서 기질적인 성(性)과 인간 본질로서의 성(性)은 차이가 있다. 기질상의 성(性)은 이목구비(耳目口鼻)와 같은 감각을 받아들이는 통로와 관계 있어서 인간의 본성이라 말하지 않는다. 반면 성선(性善)의 선(善)은 도덕 가치를 강조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내면 규범이다. 맹자는 인간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의(義)와 인(仁)을 실천하는 주체로서의 본성(本性)은 선(善)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맹자가 주장하는 선(善)은 사욕(私慾)에 치우치지 않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의욕의 선(善)으로, 이는 자연과의 조화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인간의 마음이고, 이것이 계속 지속되어 도(道)로 나아가는 측면이 곧 성(性)(유승권, 2011)이므로 인간의 본성은 성선(性善)이라는 입장을 맹자는 피력하였다.

 

< 유아교육철학 및 교육사, 김희태·정석환, KNOUP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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