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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교육철학

낭만주의와 유아교육 – 낭만주의의 이해와 프뢰벨의 생애

by ⍣Humpback whale⍣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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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주의의 이해

낭만주의(romanticism)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나타난 정신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술, 문학, 철학, 교육 등에 영향을 미쳤다. 낭만주의는 모든 것을 합리적이고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계몽주의와 형식적이고 인습적인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철학 사조이다. 낭만주의는 어린이와 같은 부드러움, 부조화의 조화 등을 언급하며 이성의 냉정함을 보제하고 자유로운 감정이나 공상, 신비로운 생각을 통해 사고의 해방을 추구하는 주관적이고 혁신적인 정신이다. 이로 인해 낭만주의는 공상으로 사실적 의미를 표현하고 현실을 두려워하는 경향을 지니며, 행동하는 인간보다 그리워할 줄 아는 인간을 추구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 내부로의 길을 추구하며 낮보다 밤을 좋아하며, 꿈, 환영, 요술 등을 동경한다. 또한 세계를 이서엥 의해 규정된 현실로 바라보기보다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관점을 유지한다.

 

낭만주의자들은 감정이 풍부한 인간, 실행력이 있는 인간을 요구하지만 사상가나 이론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낭만주의에서 영원한 것은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시간을 초월하여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데아(Idea)와 현실은 결합과 분리를 계속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이로 인해 낭만주의에 근거한 인간은 유한 속에서 무한을 추구하고, 시간 속에서 초시간적인 것을 추구하며, 무상 속에서 영원을, 지상적인 것에서 천상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에서 신적인 것을 동경하려고 한다. 따라서 낭만주의 정신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낭만주의는 문학, 철학 등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교육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낭만주의가 교육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성 교육이다. 낭만주의는 인간 형성이라는 가치의 정립을 통해 교육적인 사고와 교육제도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모습은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18세기 말쯤 독일의 괴테(Goethe)를 비롯한 낭만주의 사상가들은 일정한 형식에 갇혀 있는 고전적인 삶과 사회적인 관습에 의한 억눌림, 현실을 멀리한 사변적 인식, 내면을 상실한 피상화된 인간 존재에 반항하여 새롭고 직접적인 본성과 생동감을 찾고자 하였다.

 

낭만주의 교육은 인간의 도야 혹은 도야된 인간을 기르고자 하여, 이는 외부의 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주어진 법칙에 따라 자연적으로 성장한다. 낭만주의의 이러한 관점은 프뢰벨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는데, 프뢰벨은 인간은 본래 선하므로 모든 소질을 조화롭게 발전시켜야 하며 어떤 특수한 소질만을 조장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인간의 모든 소질을 조화롭게 성장시키는 것이 프뢰벨 교육의 이상이었고 이는 낭만주의 굥교육과 연결되었다.

 

낭만주의 사상은 피히테(Fichte), 헤겔(Hefel), 슐라잉어마허(Schleiermacher), 헤르바르트(Herbart) 등에 의해 교육적인 문제들로 연결되어 많은 교육이론을 발전시켰다. 프뢰벨에게 영향을 준 낭만주의 사상가로는 칸트(Kant), 피히테, 셸링, 크라우제, 슐라이어마허 등이 있다.

 

■ 프뢰벨

1. 생애

유아교육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아우구스트 프뢰벨(Friedrich Wilhelm August Froöbel, 1782~1852)은 1782년 4월 21일, 튀링겐(Thüringen) 지방의 오버바이스바흐(Oberweißbach)에서 목사인 요한 야코프 프뢰벨(Johann Jacob Fröbel)과 어머니 야코비네 엘레오노레 프리드리카 호프만(Jakobine Eleonore Friedrica Hoffman)의 여섯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지 9개월만에 어머니가 병사했고, 아버지는 새로운 교회 건립을 감독해야 했기에 형과 누나들이 프뢰벨을 돌보았다.

 

4세 때 아버지가 재혼하여 의붓어머니가 프뢰벨을 돌보았지만 의붓어머니가 아이를 낳자 관심을 받지 못해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냈다. 이로 인해 프뢰벨은 일찍부터 자신에 대해 골몰하는 내성적 성향의 사색과 명상에 잠기는 소년으로 자랐으며 자연은 관찰과 사색의 대상이었다. 그는 튀링겐의 숲을 벗 삼아 성장했고 이러한 경험은 그가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는 토대가 되었다.

 

1789년 그의 부친은 여학교가 남학교보다 더 잘 가르친다고 생각하고 여학교에 보냈다. 11살이 되었을 때 목사인 외삼촌 호프만은 가정 분위기가 양육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프뢰벨의 양육과 교육을 맡았다. 또래와 마음껏 뛰놀며 자연을 탐색하고 질문하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1797년에 프뢰벨은 당시 측량사이자 산림관인 비츠(Witz)의 문하에 입문하여 산림관으로 갖추어야 할 임업, 사정, 기하학, 측량술 등을 2년 동안 배웠다.

 

1799년 예나 대학철학과에 입학하여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응용수학, 대수학, 기하학, 광물학, 물리, 화학, 임업, 건축학, 측량술 등을 배웠다. 그러나 학비로 빌려 쓴 돈을 갚지 못해 1801년 예나 대학의 감옥에 갇혀 9주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1806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모범학교 교장인 그루너(Gottlieb Anton Gruner)의 제안으로 교사가 되어 산수, 그림, 지리, 독일어 등을 가르쳤다. 이때 프뢰벨은 이페르텐(Iferten)에 있는 페스탈로치를 만나 2주 동안 페스탈로치의 학원에서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과 정신을 경험하였고, 교육자로서의 역할과 장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2년 뒤 모범학교를 사직하고 홀츠하우젠가의 가정교사가된 프뢰벨은 유아들을 시골에서 교육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크푸르트 근처 오더라는 마을에서 에밀 풍의 교육을 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을 반대하고, 자연을 벗 삼는 생활교육 속에서 인간교육의 기초를 세우려고 하였다. 과일과 꽃을 재배하고 수확하며 이것을 선물하는 즐거움을 경험하는 유아들을 통해 프뢰벨은 인간의 생명교육과 자연의 결합에 대해 확신하였고 이는 이후 노작교육에 반영되었다.

 

1808년 여름에 페스탈로치를 다시 방문하여 2년 정도 함께 지냈다. 프뢰벨은 페스탈로치의 인격에 감명받아 교육자로서의 생애에 가치를 두었다. 또한 페스탈로치의 국민교육사상에 매력을 느꼈으며 직관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학습방법을 배웠다.

 

독일로 돌아온 프뢰벨은 교사로서의 자신을 수련하기 위해 1811년에 괴팅겐 대학에 입학하여 과학과 광물학을 공부하면서 만물을 지배하고 통일하는 신성의 사상을 자연과학 영역에 도입하여 통일에 관한 결정의 법칙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듬해에는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결정학의 권위자인 바이스(Christian Samuel Weiß) 교수 아래에서 광물학, 결정학, 물리학 등을 연구하였으며 종교철학을 배웠다. 그러다가 유럽에 전쟁이 발발하자 1813년 의용군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에 참가하였고, 1814년 전쟁이 끝나자 베를린 대학의 광물학 조교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존경하고 신뢰했던 형 크리스토프가 전사한 뒤 형수가 조카들의 교육문제를 상의해 오자 프뢰벨은 스톡홀름 대학의 교수를 거절하고 1816년 그리스하임에서 조카와 다른 아이들을 위한 ‘일반독일학교(Die Allgemeinen Deutschen Erziehunganstalt)’를 창설하고 교육활동을 하였다. 1817년에 카일하우로 학교를 옮겼고, 1818년 9월에 빌헬미네(Wilhelmine Henriette Hoffmeister)와 결혼하여 학교를 가정적인 분위기로 만들었고,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교육내용도 점차 충실해졌다. 그러나 카일하우의 학교가 지녔던 조국통일과 자유, 독립사상 등의 정신이 주위의 오해를 받았고 정부의 부당한 간섭의 쇠퇴를 맞아 문을 닫았다.

 

1837년에 프뢰벨은 부인인 빌헬미네의 제안에 따라 고향인 바트 브랑켄부르크로 돌아와 자신의 교육이념에 의한 ‘자기교수시설(Autodidaktische Anstalt)’을 설립하였다. 여기에서 프뢰벨은 놀이활동을 통한 교육을 시간 낭비로 간주하는 당시의 추세에도 불구하고 유아의 본성에 따르는 교육을 주창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자연적 본성은 놀이, 게임, 동식물을 기르고 재배하는 활동을 통해 개화되어 전체적을 통일된 조화로운 인간을 형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프뢰벨은 놀잇감과 교구를 제작하여 보급하면서 자신이 고안한 놀잇감을 은물(恩物, Spielgaben)이라고 했다. 프뢰벨의 교육방법에 대한 일부 학부모들의 이해 부족으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그의 명성은 점차 높아갔다. 1839년에 프뢰벨은 브랑켄부르크에서 ‘유아교육지도자 양성원’을 개설하여 남녀 유아교사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강습생들의 실습을 위해 6세 이하의 유아 약 40명을 모아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놀이와 작업교육(Spie und Beschaftingungsanstait)’이라고 이름붙였다. 프뢰벨은 유아의 모든 흥미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작업 충동을 기르는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작업은 행동하고 지각하며 사고하는 인간 본래의 활동에 따른 것이고, 작업이나 놀이 요구에 충실히 따라서유아를 교육할 때 신체의 수족이나 감각기관을 강하게 하고 심정의 발달이나 정신의 도야, 내재하는 감각을 눈뜨게 한다고 믿었다. 학원의 이름을 유아교육에 알맞게 붙이고자 생각하던 프뢰벨은 동역자와 함께 튀링겐의 산길을 넘어오다 경치에 매료되어 1840년 ‘킨더가르텐(Kindergarten)’으로 바꾸었다. 이 말은 식물이 건강하게 성장하듯 인생 초기에 많은 가능성을 가진 유아는 자연과 산과 조화하면서 경험이 풍부한 정원사인 유아교사의 돌봄을 받으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1843년에 《어머니의 노래와 사랑의 노래》를 발간한 프뢰벨은 이후 보모 양성과 유치원의 보급에 주력함과 동시에 여성교육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부인 빌헬미네가 1839년에 죽은 이후에 혼자 지내던 프뢰벨은 카일하우 시대의 제자이며 헌신적인 봉사자인 루이제 레빈(Louise Levin)과 1851년 결혼하여 교육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치원은 유아들에게 무신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이유로 1851년 프로이센 정부가 금지령을 발동하였고, 프뢰벨은 정부의 오해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고 다음 해인 1852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유아교육철학 및 교육사, 김희태·정석환, KNOUP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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